여러 명을 동시에 평가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할지, 누구를 더 키울지, 누구의 산출물을 더 신뢰할지. 그때마다 “기획 잘함” “도메인 좋음” 같은 단일 변수로는 제대로 된 그림이 안 나왔다.
그래서 4개의 축으로 분리해 봤다. 이전 글에서 정리한 “기획 = 도메인 × 기획 역량” 공식의 확장판이다.
4개의 축
- 도메인 지식 —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
- AI 활용 역량 — 시스템 설계와 도구 활용 능력
- 기획 역량 — 고객 니즈와 PMF를 발견하는, 도메인 무관한 일반 능력
- 브랜드/레거시 — 기존 고객 충성도, 네트워크, 인지도
이 4개는 서로 독립이다. 도메인이 깊어도 AI 활용이 약할 수 있고, 기획 감각이 좋아도 레거시는 제로일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치는 이 4개를 따로 측정한 뒤 합쳐서 봐야 보인다.
시간 특성의 차이
흥미로운 건 각 축의 시간 함수가 다르다는 점이다.
- 도메인 지식 = 누적 적분값. 시간이 만들어준다. 단기간에 못 메운다.
- AI 활용 역량 = 미분값. 가속도, 추세. 지금 당장 차이가 난다.
- 기획 역량은 선천적 성향과 훈련의 합. 누적되긴 하지만 도메인보다 훨씬 빨리 흐르는 변수.
- 브랜드/레거시는 누적 자산. 도메인보다도 더 천천히 만들어진다.
평가할 때 이 시간 특성을 섞어버리면 그림이 망가진다. 적분값은 적분값으로 보고, 미분값은 미분값으로 봐야 한다. “이 사람이 5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될까”를 예측하려면 미분값을,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자리에 어울리나”를 정하려면 적분값을 봐야 하는 식이다.
디지털 친화도가 만드는 격차
같은 도메인 수준의 두 사람이 있어도 AI 활용 역량(=디지털 친화도) 하나로 결과물이 2~5배 차이 난다. 케이스에 따라 10배까지 본 적도 있다.
이게 미분값의 무서움이다. 적분값(도메인)은 천천히 차이가 벌어지지만, 미분값(AI 친화도)은 지금 이 순간의 차이가 곧바로 산출물에 나타난다. 1년 전과 지금이 같은 도메인 수준의 두 사람이라도, 이 사이에 AI를 어떻게 흡수했는가에 따라 1년 후의 격차는 적분값으로 누적된다.
그러니 지금 디지털 친화도가 낮은 사람을 그대로 두는 건, 1년 단위로 보면 도메인 적분값마저 못 따라잡게 만드는 결정이다.
분리 공식
처음에는 4개 축으로 정리했는데, 격론 끝에 한 번 더 쪼개졌다.
기획 퀄리티 = 도메인 지식 × 기획 역량
기획 안에 도메인 지식이 들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다. 일리는 있다. 그런데 다른 도메인으로 가도 통하는, 도메인과 분리되는 일반 기획 능력이 분명히 있다. 동일 도메인 수준의 두 사람을 비교했을 때 그 안에서도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래서 두 변수를 분리해 곱셈으로 묶는 게 모두에게 수긍됐다. 평가도 따로, 육성도 따로. 이렇게 분리해 두면 신입에게 도메인 외의 축을 일찍 훈련시킬 명분이 생긴다.
신입의 성장 경로
도메인 지식이 적다고 신입을 미루면 안 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4개 축 중 도메인은 시간이 만들어주는 변수고, 그 외는 병렬 학습이 가능하다.
오히려 도메인이 더디게 차오르는 시기에 다른 축을 빠르게 끌어올려두면, 도메인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순간 곱이 폭발한다. 거꾸로, 도메인만 천천히 쌓아올린 사람은 다른 축이 비어 있어 결과물이 평범한 채로 머문다.
신입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AI 친화도와 기획 감각을 빠르게 키울 수 있는 자리”다. 도메인은 자리만 있으면 시간이 채워준다.
회사를 평가할 때도 같은 모델
이 모델은 사람뿐 아니라 회사를 볼 때도 그대로 쓸 수 있다. 좋은 회사인지 판단할 때 “AI 활용 역량” 축에서 신호로 쓸 만한 것들이 있다.
- Claude API 토큰 결제를 회사가 지원하는가
- AI 도구 활용을 권장하는 커리큘럼이 있는가
- “왜 AI 안 쓰고 직접 하느냐”고 묻는 사수가 있는가
- 토큰 비용을 자기 돈으로 쓸 엄두가 안 나서 못 떠나는 직원이 있는가
마지막 항목이 가장 강력한 신호다. 직원 한 사람이 회사가 제공하는 AI 인프라가 너무 좋아서 사비로는 못 만들겠다고 느끼는 회사는, 그 자체로 미분값이 빠르게 도는 조직이다.
마무리
평가 모델은 단순할수록 잘 작동한다. 단, 단순하다고 해서 단일 변수로 줄여서는 안 된다. 4개의 독립 변수를, 각자의 시간 특성을 살려서 곱하고 합쳐 보는 것. 그게 실무에서 통하는 그림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4개 축이 채용·배치·승진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풀어볼 생각이다.